해당 칼럼에 삽입된 스크린샷은 정품 게임을 통해 필자가 직접 촬영했으며, 그 외 사진은 유튜브 혹은 공식 사이트에서 따온 것임을 알립니다.
신세대 게이머답게 노래 한 곡 틀어놓고 시작하자.
보통의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미지화하는 ‘게임’은 대개 총과 폭력, 무자비한 학살을 포함한 자극적인 오락이다. 이 이미지가 온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게임은 단순한 오락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왔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최신 IT 기술은 대부분 게임에서 가장 먼저 적용되며, 그래픽과 하드웨어는 게이머라면 단연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의 게임은 조이스틱 하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의 개념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높은 사양과 함께 공감 가능한 지성·이성을 요구한다.
전설의 귀환. (DOOM, 2016)
게임계에 유구한 전설과 함께 내려오는 말이 있다.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한때 윈도우보다 더 많은 다운로드 수를 가졌던 전설을 가진 게임 ‘DOOM’의 개발자 존 카맥이 1992년에 남긴 말이다. 현대의 게이머들이 보기에는 조금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으나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던 시절이었다.
1993년 최초 발매된 둠은 FPS의 첫 역사를 쓴 작품이자 전설이고, 동시에 그 시대에 활용 가능한 최대한의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현대의 관점에선 PS1도 못 미치는 폴리곤 덩어리가 가득한 게임이다. 존 카맥은 1993년의 기술로는 도저히 스토리와 배경, 설정을 표현해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결과적으론 그의 판단이 맞았다. 초창기의 둠 시리즈는 스토리를 텍스트로 간략하게 연출했고 나머지는 오로지 10점 만점에 12점인 살육뿐이었다.
그러나 1990년 후반까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스토리 연출을 최초로 해낸 게임이 있다. 화성에 둠 가이가 있다면 블랙메사에는 고든이 있는 법. 밸브가 제작한 ‘하프라이프’는 끊기지 않는 레벨 디자인과 NPC들의 대사, 행동, 맵을 이동하며 볼 수 있는 다양한 연출을 통해 하나의 스토리와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다른 의미로 전설인 그 장면. (Half-Life, 1998)
하프라이프는 그동안 단순한 선형 게임만을 즐기던 게이머에게 새로운 관점을 부여했다. 쏘고 움직이기만 하던 게이머들은 맵(배경)의 변화가 스토리와 연관된다는 파격적인 기능에 하프라이프에 열광했고 이는 곧 스토리 게임의 등장을 의미했다. 오락에 불과하던 게임은 ‘서사’를 부여받으며 새로운 대중 예술, 그리고 문화로 발전했다. 하프라이프가 게임 예술의 첫 문을 열었다고도 할 수 있는 만큼 이는 게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
3을 모르는 그분... (Gabe Newell, 1962)
하프라이프는 후속작이라는 개념을 새로 정립하기도 했다. 이때까지의 후속작이란 같은 IP(지식재산권)에 발전한 게임성, 그리고 새로운 맵 정도의 상업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하프라이프는 스토리의 연속성을 위해 후속작을 제작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1993년 발매한 둠은 8개월이란 짧은 시간 만에 ‘둠 2: 헬 온 어스’라는 후속작을 발매했다. 그러나 둠2를 구매한 대부분의 게이머는 둠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서,보단 둠을 더 즐기고 싶어서,에 가까웠을 것이다. 둠은 ‘악마가 왔다─악마가 사람(혹은 토끼)을 죽인다─고로 악마를 죽인다’에 가까운 1차원적이고 평면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둠 가이가 왜 화성에 오게 되었는지, 그가 지구에 도착한 후 오히려 더 분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유와 설명은 있었으나 이것이 게임을 더 즐기게 만드는 주 원동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프라이프를 즐긴 이들은 고든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G맨은 누구인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고 후속작을 기대한다. 그 결과 밸브는 하프라이프2라는 또다른 세기의 명작을 만들어내며 게이머들의 찬사를 받았다. (물론 이 이후 3 대신 알릭스라는 숫자를 받게 되는 저주에 걸리긴 했다.)
밸브는 결국 하프라이프로 VR게임의 새 지평을 열게 되었다. (Half-life: Alyx, 2020)
하프라이프 이후 게임사들은 스토리를 다듬은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만 해도 콜 오브 듀티: 모던워페어, 데드 스페이스, 레프트 4 데드, 파 크라이 등 게임성은 물론 서사까지 훌륭한 게임이 등장했다. 게이머들은 첫 편을 즐기고 스토리의 연속성을 기대하며 ‘후속작’을 바라는 형식의 프랜차이즈에 금방 익숙해졌고, 이때부터 게이머는 게임을 판단하는 기준에 ‘스토리’라는 새로운 관점을 고착하게 되었다. 2020년이 된 지금, 게임은 게임성만이 아닌 그래픽과 기술, 음악, 설정, 영향력 그리고 스토리로 평가받는다. 이는 타 예술과 비교했을 때 독특하고도 종합적인 특성을 가지는 게임만의 특징이 되었다.
아직도 경악 중이실 우주 공돌이. (Dead Space, 2009)
그러나 이 ‘스토리’ 때문에 게이머들이 고통받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뛰어난 스토리가 많지만 엉망인 스토리는 그보다도 더 많다. 2019년 발매된 보더랜드3는 전작에 비교해 더 커진 스케일과 총기, 보더랜드 특유의 엉망진창왁자지껄바쁘다바빠우주사회인 분위기로 기대를 끌어모았지만 결과는 짜증 나는 어린애와 불타오르는 주작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의 게이머들이 보였던 태도는 모두 같았다. ‘???’. 보더랜드 3는 정말 얘가 왜 이래, 와 얘가 여기서 왜 나와, 의 향연인 씁쓸한 귀환이었다.
디자인은 또 짜증 나게 잘해놔서 호구 에디션을 사게 만든다. (Borderlands 3, 2019)
게임에는 엉망인 스토리나 나오느니만 못한 스토리도 있었으나, 그중 단연 최고이자 가장 오래 화자 되는 것은 바로 ‘중단’이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명작 중의 명작, 마스터피스를 만들어 놓고, 정작 후속작을 안 들고 온다. 그리하여 게이머들을 미치게 만든 게임은 모두가 알고 있듯 하프라이프 2: 에피소드 2가 가장 대표적이다. 졸지에 아버지 시신 앞에서 16년간 울고 있던 알릭스처럼 게이머들은 게이브 뉴웰의 모든 인터뷰와 행동을 신경 쓰고 결국에는 일루미나티까지 끌고 오면서 울었지만 결과는 알릭스 뿐이었다. 그나마 하프라이프 팬에겐 프랜차이즈의 명맥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자 고통일 것이다.
VG247.com 유튜브 영상 캡쳐. (Half Life: Alyx, 2020)
반면 완전히 명맥이 끊겨서 고통받는 이들도 있다. 호러 게임계의 영원한 명작인 데드 스페이스는 시리즈를 무려 3편까지 발매했으나 지구가 위험이 처한, 가장 절정인 부분에서 게임이 끊겼다. 다 먹는다는 EA의 산하에 데드 스페이스 3은 호러 게임의 대표작이라는 영광마저 쇠퇴하여 ‘액션의 비중이 높아진 라이트한 상업용 공포 게임’이란 평가가 뒤따랐고 제작사인 ‘비서럴 게임즈’는 공중분해에 가까운 결말을 맡게 되었다. 얼마 전 비서럴 게임즈의 제작진이 ‘데드 스페이스’ 계열의 신작을 낸다는 희소식이 나왔으나 이는 결국 새로운 스토리의 시작일뿐, 우리의 우주 공돌이 아이작 클라크는 영원히 우주에서 머물게 된 듯싶다.
문이 먹고 있는 건 지구가 아니라 비서럴 게임즈라 카더라. (Dead Space 3, 2013)
그렇다면 게임의 좋은 스토리는 무엇일까. 게임에게는 영화도 소설도 해낼 수 없는 몰입과 체험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게임을 하는 동안 스크린을 응시하고 활자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며 결과를 향해 나아간다. 다른 예술 작품에서도 모든 체험자는 색다른 경험을 하지만 게임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게임 플레이 시간도 다르고, 체감 난이도도 다르며, 멀티 엔딩의 경우 각각 만들어낸 스토리마저 다른 경우도 있다. 아마 게임의 스토리란 게임성과 예술성이 함께 맞물려, 게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낼 때 가장 큰 효과를 낼 것이다. 덕분에 스토리는 좋으나 게임성이 떨어질 때는 게임의 본질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큰 호응을 불러오기 어렵다.
최선은 다했으나 게임성으로는 아쉬웠던 ‘게임’. (Detroit: Become Human, 2018)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대부분의 게이머가 인정하는 ‘좋은 인터렉티브 무비’ 장르였으나 게임성 위주로 따지는 게이머에게는 아쉬운 작품이었다. 스토리를 뒷받침해야 하는 경험과 즐거움은 모든 부분에서 QTE(짧은 시간 내에 올바른 버튼을 누르는 연출)로 대체하였고, 직접 다른 길을 선택하거나 나아가는 여타 게임과 달리 입력창의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달라지는 부분은 기술의 한계인가, 싶기도 했다. 다양한 결말과 상황을 제한된 예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인터렉티브 무비 장르의 단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게임’으로써 잘 만들어진 즐거움이 적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두가 재밌고 좋은 글을 알지만 그것을 실제로 써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좋은 스토리와 게임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게임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좋은 스토리의 게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아마 우리를 감동하게 만들고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 (God of War, 2018)
그리스 시대의 그의 방식은 “다 네 잘못이야. 내가 뭘 잘못한 건 다 너 때문이야. 아니면 너 때문, 아니면 너 때문이야.” 자신의 잘못인 적이 없죠. (···) 아트레우스는 크레토스의 어두운 마음에서 인간성을 끄집어내죠. 그가 그걸 성공적으로 해내게 되면 옳다는 느낌, 뭔가 얻었다는 느낌, 뭔가를 성취해냈다는 느낌을 주죠. 바닥까지 무너졌던 사람에게 무언가 구원의 기회를 준다는 건 만족스럽죠. 크레토스가 마지막에 가서 백마를 타고 가 모두를 구하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무슨 영웅 서사시가 아니죠. 크레토스의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여행입니다.
크레토스의 변화, 방앗간 비둘기 채널.
2018년 모든 게이머의 심장을 훔치며 돌아온 갓 오브 워 시리즈는 좋은 스토리의 교과서적인 존재였다. 2005년 완전한 그리스 비극 서사로 처음 출범한 갓 오브 워는 뛰어난 기술력, 놀라운 게임성으로 전 세계의 게이머를 흡수하며 명실상부 PS 독점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 출시한 갓 오브 워 3에 다다르자 일부 팬들은 반복되는 복수란 주제, 잔인하고 광기로 가득 찬 스토리에 매너리즘을 표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게임 전체의 붕괴로 이어져 제작사 산타모니카조차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갓 오브 워는 당시는 물론, 현재에 보아도 놀라운 기술력과 연출, 혼까지 뽑아낸 그래픽을 보유한 게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오브 워가 사랑받음과 동시에 지탄받은 것은 평면적인 크레토스(주인공)의 모습과 점점 비슷해지는 복수 스토리에 있었다.
이 이야기로 무엇을 말하고 싶냐고요? (···)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도피였던 것 같네요. 어, 그러니까··· 변화가 가능하다는 걸 말이죠.
Raising Kratos, PlayStation Korea 채널.
갓 오브 워 2와 갓 오브 워(2018)의 디렉터인 코리 발록은 2018년 갓 오브 워의 리부트작이자 후속작인 갓 오브 워(2018)의 발매 전 인터뷰에서 자주 ‘변화’를 언급했다. 게임의 변화, 크레토스의 변화, 그리고 그 자신의 변화가 있었다. 코리 발록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아버지’가 된 경험을 크레토스 또한 함께 경험하길 바랐고 이는 아트레우스의 등장으로 실현되었다. 그리스 시리즈에서 크레토스는 피에 젖은 살인귀이자 가족에게 해준 것은 살인뿐이었으나 리부트작에 들어선 그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인 ‘언제나 괴물일 거라는 것’을 수용하고 변화한다. 과거면 그 말을 한 사람의 척추를 뽑았겠으나 지금은 다르다. 이것이 서사의 변화를 통한 발전이었다.
크레토스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아들이 가질 미래를 위해 과거의 죄악을 상징하는 블레이드를 꺼내러 갈 때,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아들이 보고 절망할 때, 마지막으로 자신의 죄를 아들 앞에서 스스로 시인할 때의 무거운 감정을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두 부자가 결말을 통해 드디어 진정한 부자로서 어머니를 보내주는 장면에서는 여느 영화 못지않은 감동과 따듯함을 주었다. 그 장면이 끝나자마자 충격적인 반전이 이어진 건 덤이다. 갓 오브 워는 기술과 도전 면에서도 훌륭한 후속작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빛난 것이 바로 스토리였다. 모든 이들이 호평하고 GOTY 상을 받게 된 가장 큰 원동력 또한 스토리의 변화에 따른 게임 전반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추방된 신, 아버지의 수치, 어머니의 희망, 아이의 시련. (···) 신들의 재앙, 나는 죄를 지었으니, 아이를 믿어라, 그의 분노를 가라앉혀라. 피의 저주는 돌이킬 수 없으나. 그는 나아간다, 나에게 구원은 없을지니··· (···) 공포는 커지고, 상처는 남는다. 그는 고통받고 있다, 아이에겐 아버지가 필요하다, 신이 아니라··· 피의 저주, 나에게 구원은 없을지니, 상처는 남는다, 과거와 마주하라.
God of War, 2018
세상에는 대단한 게임이 많고 그 게임의 수보다 더 많은 대단한 개발자가 존재한다. 몇 해 전 갓 오브 워와 둠이 리부트된 이후 레프트 4 데드 2의 신규 대규모 업데이트, L4D1의 제작진이 새로 선보인 Back 4 Blood, 데드 스페이스 개발진이 다수 투여된 칼리스토 프로토콜 등 과거의 영광이 바래가는 게임의 귀환이 이어지고 있다. 2018년에 비해 게임 흉년이었던 2019, 2020년에 비해 2021년과 2022년은 상기된 것만으로도 기대작으로 넘쳐나는 상황이다. 이 중 얼마나 많은 게임이 살아날지 몰라도 게임계는 이들의 흥망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다.
코로나19로 신음하는 게임계를 응원하며, 오늘은 자택 근무를 통해 제작해낸 훌륭한 게임을 하나 소개한다. 첫 데뷔작으로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낸 Moon Studios의 Ori 프랜차이즈다. 2020년 발매된 후속작 오리와 도깨비불은 전 세계의 뛰어난 게임 개발자들이 자택 근무를 통해서도 완성도 높게 개발한 게임이다. 눈이 즐거운 그래픽과 재밌게 매운 난이도, 따듯하고 아름다운 스토리를 감상하고 싶다면 오리와 눈 먼 숲, 오리와 도깨비불을 체험해보는 건 어떨까. 어쨌든 모든 Game과 Play, 그리고 Sotry의 본질은 ‘즐거움’이니 말이다.
환상과 사랑의 세계로. (Ori and the Will of the Wisps)
W. 2824 이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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