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속에서 고전문학을 접할 일은 많지 않다. 우리가 아는 고전문학이란 대개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에 한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양반에 의해 지어졌다고 배운다. 물론 백성들도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고는 하나 대개 작자 미상으로 전해진 작품들을 보게 된다.
예외로 교과서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산은 옛 산이로되’ 등을 쓴 황진이는 엄연한 공노비였다. 현대의 우리로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천민이라 불리던 노비들도 나름대로 문학작품을 향유했던 것이다. 오늘은 조선시대의 노비 생활사와 그들이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알고 보면 고전소설 속 대다수의 캐릭터는 노비이다. 대표적으로 춘향전의 춘향이와 방자, 향단이를 들 수 있다. 이는 조선 시대 인구 비율의 30~50%를 노비가 차지했기 때문인데, 비율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야기 속에 노비를 등장시키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었다. 쉽게 공노비는 나라에 속해있는 노비, 사노비는 양반들이 재물로써 소유하던 노비라고 볼 수 있다. 공노비는 직업군인, 관기(기생)나 무수리의 이미지로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다. 춘향이는 공노비 관기로서 사노비인 향단이를 들였던 것이다.
노비의 수는 17~18세기에 걸쳐 전체 인구 60% 가까이에 이르기도 했다. 이는 노비를 개인의 재물로 환산해 쓰던 탓에 이루어진 사회적 폐단이다. 사노비의 수를 늘리기 위해 소유주들이 ‘(부모 중) 하나만 천해도 천한 것이다’는 관행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노비와 양인이 결혼해 낳은 자식도 당연히 노비가 되는 불합리한 사회구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로 노비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납속책의 등장으로 노비더라도 돈을 내면 벼슬을 받아 해방될 수 있었고, 화폐경제가 등장해 땅이 없어도 의식주가 가능하게 되며 도망 노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당대의 혼란스러운 신분제도에 관한 서민들의 태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 있으니 ‘김학공전’이다. 이는 작자 미상의 고전 소설인데 주인공 김학공은 자신의 노비들이 학공 일가를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려 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의 주된 스토리는 자신을 배반한 노비들에게 복수를 하려는 학공의 일대기로, 탈취에 의한 신분해방에 대해 반대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반면 옥향과 춘섬이란 캐릭터는 속량(대가를 치르고 노비 신분에서 양인 신분으로 올라감)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목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정당한 절차에 따른 신분해방은 지지하고 있다.
김학공전을 비롯해 비슷한 시기에 나왔으리라 추측되는 ‘청구야담’, ‘삽교별집’ 등의 작품 등에서도 능동적으로 신분 상승의 욕구를 표출하는 노비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는 당대 사람들의 인식변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노비들이 이처럼 신분 상승에 집착했던 것은 그만큼 노비의 대우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노비는 관청에서 일하기에 처지가 나았지만 양반의 소유물 그 자체이던 사노비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인간이지만 매매, 상속, 증여가 가능했고 소 한 마리보다도 싼 값에 거래됐다.
노비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노비의 소유주가 행하는 처벌이었는데, 사실상 관아가 아닌 개개인의 집에서 행하는 형벌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노비들에겐 극악무도한 형벌이 가해졌다. 세종 때에 이를 금하였다고 하나 숙종 때에도 해당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노비를 벌하는 관습은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권문세도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릴 땐 죄인의 코를 베어버리거나 복숭아뼈 부근의 근육을 끊고, 아킬레스건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등의 잔악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한다.
여女노비는 소유주의 성노리개로 전락하는 일이 허다했다. 여종에 얽힌 음담패설에 가까운 야담들은 ‘어수록’과 ‘고금소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야담 속에서 그녀들은 주인의 장난감이고, 주변의 시선 또한 이를 당연하게 여기며 그들을 보호해줄 제도적 장치도 없기에 처량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런 상황마저도 시조로 써낸 시인이 있으니 안동 권씨 집안의 여종 ‘얼현’이다. 다음은 ‘해동시화’에 실린 그녀의 시이다.
『가을밤에 생각이 있어(秋思)』
하늘은 물과 같이 맑고 달은 창창한데
나뭇잎 떨어지고 밤에 서리 내리네
열두 겹 주렴 속에 외로이 홀로 자니
옥병풍 좋지마는 원앙이불 부럽구나
시 속에서 그녀는 홀로 방에 누워있다. 노비인 그녀의 방에 옥병풍이 있을 리 만무하고 호사스러운 주렴(구슬을 꿰어 만든 발) 또한 말이 안 되니 방은 분명히 양반의 것이겠다. 그녀는 외로움 속에 원앙이불을 생각하고 있다. 여종으로서 하룻밤의 유희에 사용당하고 진실 된 마음은 받지 못하는 처지의 슬픔을 시로 승화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노비의 신분으로 시인이 된 사람이 있으니 ‘백대붕’이다. 기록에선 ‘본래 천하게 태어났으나 궁중의 열쇠를 보관하는 벼슬에까지 오른 이’라고 한다. 그의 시는 문장이 좋기로 유명하니 태어난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어쩜 앞서 소개했던 야망 가득한 노비들을 그려낸 소설들도 작가가 노비일지 모른다. 기록되지 못했을 뿐. 모쪼록 신분에 상관없이 당대의 모습을 그려내려 노력했던 작가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마지막은 ‘백대붕’이 쓴 시 한 편을 보며 끝내도록 하겠다. 다음 시에서는 벼슬에 올라서도 본인의 출생을 당당히 여기는 시인의 정신과 천대받는 태생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해학 가득한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중양절에 술에 취하여 읊음(九日醉吟)』
술 취해 산수유꽃 머리에 꽂고 혼자 즐기니
산 가득한 밝은 달 아래 빈 병 베고 있네
옆 사람은 내가 뭘 하는 사람이냐 묻지 말게
흰머리로 이 풍진 세상 전함사 종놈이라네
※참고문헌 : 이상원, 노비 문학산고 (얼현과 백대붕의 시 한글 해석 따옴)
김나영, 고전 서사에 형상화된 노비의 존재성 탐구(2014)
w. 2828 구구
고전소설을 읽으면서 캐릭터가 노비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노비 캐릭터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또한 고전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노비에 관한 인식 변화도 흥미로웠어요👍